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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진화 심리학자의 시초 다윈(3)

by 데이지덕93 202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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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물 화석 발견


파타고니아에 있는 푼타아틀라에서는 절벽의 오래되지 않은 조개껍데기 옆에서 멸종한 거대 포유류의 화석 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날씨나 재해로 인한 변화의 징조 없이 최근에 멸종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증거였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메가테리움(Megatherium) 곧 땅에서 나무뿌리를 먹으며 사는 늘보의 화석을 치아와 뼈 장갑의 연관관계를 이용해서 밝혀냈는데, 처음에는 그 지역에 있는 아르마딜로가 가지고 있는 장갑의 거대한 확장판처럼 보였다.
그 최초의 발견은 영국에 귀국했을 때 큰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가우초(목동)들과 함께 말을 타고 내륙으로 지질학을 탐사하며 화석을 더 수집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혁명의 시기에 원주민이나 식민지 사람 모두를 바라보는 사회적, 정치적, 인류학적 통찰을 가지게 했으며, 두 가지 종류의 레아(남미 타조)가 분리되긴 했지만, 겹치는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그는 계단 모양의 널빤지 같은 평원과 해안에서 길러진 조개껍데기를 목격했는데, 이것은 일련의 융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엘의 두 번째 권을 읽고, 종 창조의 중심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발견과 라이엘의 부드러운 연속과 종의 멸종에 관한 개념에 도전하는 이론을 받아들였다.


원주민과의 만남


비글호의 첫 번째 남미 탐사에서 푸에지언의 습격
비글호에는 세 명의 파타고니아 원주민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첫 번째 비글호의 항해에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이들이었다. 첫해에는 잉글랜드에서 보냈고, 이번 여행에서는 선교사로 참여하였다. 다윈은 이들이 정감이 있고, 문명화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들의 친척들은 야생에서 길들인 동물들처럼 거칠고, 비참하고, 저급한 야만인들처럼 보았다. 다윈에게는 이들의 차이가 문명 진보의 차이이지, 인종적 저능함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잉글랜드 사람과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전통이 다른 것뿐이지, 인종이 우열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이는 반(反)진화론 기독교인들이 다윈이 원주민들을 미개인으로 생각하여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중간 진화단계가 있었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을 보고 철회했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과학자 친구들과는 달리, 인간과 동물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다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년이 지속되었고, 선교는 포기를 하고 만다. 지미 버튼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파타고니아 원주민은 아내를 얻어 다른 원주민들처럼 살았으며,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윈은 칠레에서 지진을 경험했고, 높은 파고에 휩쓸린 홍합층을 포함한 육지가 막 솟아올랐던 징후를 보았다. 높은 안데스산맥에서 조개껍데기와 모래 해변에 자라는 여러 화식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는 육지의 융기와 바다 섬의 침강 그리고 산호 보초 그들을 둘러싸 산호섬이 되었다고 이론화했다.
지리적으로 새로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다윈은 더 오래된 "창조의 중심"에 덧붙여진 야생에서 증거를 찾았고, 흉내지빠귀(mockingbird)가 칠레의 그것과 연관은 있지만, 섬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그는 그들이 왔던 섬마다 약간씩 변종이 된 거북이 껍질 형태가 있다는 것을 총독에게 들었지만, 식용으로 잡은 거북이를 잡아먹은 후에도 그것들을 수집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유대류 쥐캥거루와 오리너구리가 너무 특이해 보여 이 두 가지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곳 원주민(에보리진)들이 유머를 가지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이지만, 유럽 정착민들에 의해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글호는 코코스 제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사를 했으며, 그 조사는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토대가 되었다. 피츠로이는 비글호 항해의 공식적인 보고서를 쓰고 있었는데, 다윈의 일기를 보고서는 한권의 평가서로 합치자고 제안한다. 다윈의 저널은 결국 자연사에 대해 분리된 세 번째 권으로 다시 쓰인다.
케이프타운에서 다윈과 피츠로이는 존 허셀을 만났다. 그는 그 당시에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에 대한 찬사를 썼는데, "기적의 진행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자연"을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에 대한 새로운 장을 여는 대담한 숙고이자, 다른 것에 의해 멸종된 종의 대체"라고 찬사를 했다. 배가 고향을 향해 갈 때 다윈은 노트를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흉내지빠귀, 거북, 포크랜드 제도의 여우가 옳다면, "종의 안정성을 뒤흔드는 그런 사실들"(such facts undermine the stability of Species)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would를 undermine 앞에 덧붙였다. ("종의 안정성을 뒤흔들 수도 있는 그런 사실들"로 번역된다) 그는 이후 그런 사실들이 "종의 기원에 빛을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고 썼다.
1836년까지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지질과 동식물에 대하여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 결과 생물의 진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에서 나온 화석과 현생 생물과의 비교, 갈라파고스 제도에 사는 동물의 지리적 변이에서 특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세계 일주 탐험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를 정리하면서, 결과 보고서 작성에 노력하였다. 1837년 다윈은 이른바 "적색 메모장 최초로 종의 변화에 관한 착상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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